상표

많은 사람들이 저작권과 상표권을 혼동하고 특허권과 상표권도 혼동합니다. 그러나 상표는 다른 무체재산권과 역사적인 배경도 다르고 용도도 다르고 성질도 다릅니다. 묶어서 ‘지적 재산권’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같은 곳에서는 이들을 묶지 말아야 하고, 지적 재산권이라는 용어는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적 재산권’으로 불리는 권리들 간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훨씬 큰데도 억지로 묶기 위해 인위적으로 지어낸 말이고, 이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이 여러 해악을 초래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특허(patent)나 상표(trademark)의 개념은 중세 시대부터 발견되는 반면, 지적 재산권은 1990년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합니다.

그나마 저작권과 특허에는 대조할 만한 특성들이 있지만 상표는 아예 맥락이 전혀 다릅니다. 얼핏 보기에 특허법은 발명을 독점시키고, 저작권법은 저작물을 독점시키고, 상표법은 표장을 독점시키는, 같은 구조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특허의 기능은 특허권자에게 발명을 이용할 권리를 독점시키는 것이며, 특허법이 쟁점이 되는 경우는 모두 특허권자의 이익이 문제가 됩니다. 저작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작권법 소송은 모두 저작권자의 권리가 침해당했는지를 가리는 법적 절차입니다.

반면 상표는 쉽게 말해서 상품의 식별자입니다. 상품의 식별은 누구에게 필요한가요? 상품 소비자에게 필요합니다. 실제로 ‘수요자의 이익 보호’가 상표법의 한 목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1조(목적) 이 법은 상표를 보호함으로써 상표사용자의 업무상의 신용유지를 도모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함과 아울러 수요자의 이익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원론은 이렇습니다. 상표사용자는 특정한 상표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습니다. 수요자는 상품을 상표로 기억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상표에 축적된 신뢰는 상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상표사용자에게 상표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하면 공급자가 성실히 영업하여 상표에 신뢰를 부여하고자 노력할 유인이 발생하고, 가격·품질 등 여러 면에서 우수한 공급자의 상표일수록 시장에서 더 큰 보상을 얻는 효과가 발생하여 산업발전을 도모할 수 있으며, 반대로 상표사용자에게 독점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면 열심히 만든 상표도 타인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공급자가 성실히 영업할 유인을 해치고, 수요자에게는 상품의 출처를 혼동시켜 상거래의 질서를 망가뜨릴 수 있으므로 상표를 독점시킨다는 것이 상표법의 개념입니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상표를 특허나 실용신안이나 저작권과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상합니다. 특허나 실용신안이나 저작권은 지식 노동의 결과물을 독점시킨다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코카 콜라’나 ‘해표 식용유’ 같은 단어가 과연 지적인 활동의 산물이라서 독점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두부 공장을 차리고 두부에 ‘길동 두부’라는 상표를 붙여 팔기로 하고 상표 등록을 신청하면 상표 등록이 잘 됩니다. 길동 두부라는 이름에 무슨 혁신이나 창조성이 있나요? 없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고유한 식별자를 부여할 수만 있으면 상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재권론자들에겐 악마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스웨덴 해적당도 상표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며(“Trademarks are basically good, as they primarily serve as consumer protection.”), 리처드 스톨먼도 이 입장에 대해 동의를 표한 바 있습니다.

상표와 다른 무체재산권들이 전혀 다른 맥락에 있다는 것은 존속기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얼핏 보면 상표(10년)의 존속이 특허(20년)나 저작권(저작자 사후 70년)보다 더 제한적인 것 같지만, 상표는 ‘존속기간갱신등록’ 즉 무제한 연장이 가능합니다(상표법 42조 2항). 특허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5년 연장할 수 있지만 (특허법 89조) 이것은 예를 들어 의약의 특허를 출원했는데 당국의 임상 통과를 기다리느라 몇 년 동안 팔아먹지 못해서 실질적으로 존속기간이 감소해 버리는 경우 등을 보완해 주기 위한 예외 규정으로, 기본적으로 연장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표는 특허, 실용신안, 저작물 등과 전혀 달라서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서 그것을 알리고 수요자의 신뢰를 획득하는 과정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상표에는 더 큰 가치가 부여되고, 따라서 지속적인 노력을 들여 이러한 상표의 가치를 구축해 온 상표사용자의 권리와 수요자의 신뢰 양측을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예를 들어 기술적 발명에 대한 특허는 타인의 실시를 차단해 산업발전을 가로막는 명백한 역기능이 있으며, 따라서 특허의 무제한 연장을 허용한다면 산업이 망할 것입니다.

상표의 근본적인 속성 때문에 법적으로 상표권과 특허권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발생하는데, 금지청구의 범위입니다. 특허는 특허를 받은 기술에 대해 전용의 실시권이 주어져서 이와 동일한 기술을 타인은 실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상표는 수요자에게 노출되어 수요자의 식별과 판단을 도울 목적이기 때문에 수요자에게 오인될 수 있는 유사한 상표에 대해서도 금지가 가능합니다.

지정상품의 구분

‘리눅스’를 상표등록하려고 하는 시도대법원에서 인정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니터, 전자도난방지기, 전자회로학습기, 콤팩트디스크플레이어, 티브이게임세트”에 대해서 웬 한국의 개인에게 리눅스의 상표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죠. (다행스럽게도 모두 리눅스라는 이름을 붙여봤자 별볼일없는 품목입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것은 상표법이 가지고 있는 지정상품의 구분 때문인데, 쉽게 말해 “백설 밀가루의 존재로 인해 백설 공주 장난감에 백설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정상품의 구분 때문에 예를 들어 2004년부터 2014년까지 마스크팩, 크린싱크림, 스킨밀크, 약용크림, 일반화장수, 피부미백크림, 크림비누, 마사지용겔, 바디안에센스, 선스크린로션에 대해서도 ‘리눅스’라는 상표가 별도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주식회사 농심(!)에서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지정상품 쌀, 라면, 건과자, 아이스크림, 롤빵, 간장, 마요네즈, 양념용수프, 녹차, 대용커피에 대해 ‘리눅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눅스쌀, 리눅스라면이 출시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한국에서 ‘윈도’의 상표권을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도 실은 지정상품의 구분에 따라 “다이어리, 서적”에 대해 쓰지 못하는 것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등’에 대해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